소소한/사는이야기

사회성, 팔랑크스

hapkids 2016. 8. 3. 14:16

나는 인맥맹

사회성, 팔랑크스

 

농땡이 중이다. 문득 요즘 페이스북을 하면서 비교적 많은 분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수줍음(?)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문득 관계의 미숙함에 날 아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어떤 책에 따르면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수는 약 150명 정도라 한다.(로빈 던바, 사회성). 사회적 뇌 가설로 원시부족의 형태가 그러하다고 한다.(오지의 원시적 부족도 현재에도 같은 양상을 갖는다 한다.) 150명을 상회하면 부족은 분화하는 것이 통상이라고 한다.

 

원시부족은 간빙기 맘모스 같은 거대동물을 사냥할 때 맨 앞에 나서는 사람이 무리를 믿을 수 없다면 목숨을 걸고 나설 수 없다는 것이다. 고로 우정은 전쟁 또는 목숨을 거는 수렵의 상황에서 생명을 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산의 잉여로 약탈이 생겨났을 때 이 150명은 생사를 걸고 싸울 믿음, 절대적 신뢰를 갖는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사회성은 고대의 민주주의 토대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바로 밀집장창보병 대형(팔랑크스, Phalanx)이다. 팔랑크스는 원형방패로 몸을 숨기고 대형을 이루는 전투형태로 유명한 영화 [300]에서도 나온 전술이다. 이는 혹독한 훈련이 바탕이 되는 것이지만 서로간의 믿음,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이 역시 목숨을 거는 전우애를 바탕으로 한다. 팔랑크스 역시 150명은 넘겠지만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되는 전략이다. 팔랑크스의 취약점은 한명이라도 대열이 흐트러지면 무너지는 것에 있어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의 교육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신뢰는 동일한 권리를 행사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것이다. 인간의 우정과 신뢰, 즉 사회성은 불과 함께 인류를 반절시킨 하나의 요소가 분명하다.



 

여하튼 혈족이 아닌 상호간의 신뢰는 150명 정도가 한계라고 하는 것 같다. 군대의 편재도 그런 기준을 따른다.(절대적 신뢰관계의 편재인원은 중대구성으로 이는 나폴레옹시대부터의 전통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를 훨씬 많은 관계를 갖는다. 이는 생사를 건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당연하게도 생사의 스트레스와는 비교되지 않겠지만 좋은 관계라도 믿음과 함께 끊임없는 탐색과 판단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깊은 우정 또는 신뢰를 갖는 것이 전쟁, 기아 혹은 맹수로부터의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함께 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는 이를 확인하고 평가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간접적으로 보조하는 기능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나는 그게 익숙하지가 않다. 사용의 미숙이 아니라 관계의 미숙이다. 결론은 인맥맹.

 

잠시 짬 이해를 구하는 변명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