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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타인에게 말을 거는 것에 대한 위험성 본문
전재.
이 영화는 복잡다단한 세상을 한 쌍의 두 관계로 단순한 구도로 표현한다. 이것이 함정이다. 그것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의도가 없으나 우리가 동물의 패턴을 찾아 이름을 붙이듯이, 시인이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을 보고 은유를 하듯 말이다. 우리는 영화를 볼 준비가 되어있고 감독의 의도를 해석하려고 노력을 한다. 우리는 과도한 해석과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도 이 세상도 우리는 온전히 해석할 수 없다.
장면 하나.
대립 구도 : 기택(송강호)의 가족은 모두 백수, 박 사장은 글로벌 IT기업 CEO이다.
사과는 어떤 색일까? 떠올려 보라. 빨간색? 하지만 사과를 사진으로 찍어 디지털로 픽셀 단위까지 확대하면 정말 다양한 색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사과를 빨간색으로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거나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양한 세계의 수없이 많은 정보를 다 듣고, 보고, 판단할 시간이나 생각의 총량이 충분하지 않다. 때문에 각각의 집단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개별적인 것들의 가지를 잘라내어 공통된 것을 제시하여 채택하도록 한다.(해당 집단의 공통된 것을 교육하거나 문화 같은 것으로, 또는 개념으로) 그것은 우리가 행동하거나 쓰는 언어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단순한 개념을 수용하기보다 조금 더 복잡한 생각을 하는 좋은 방법은 더하거나 빼는 것이다. 이는 생존을 위한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만약 초원에 들어서는데 영양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면 이는 영양 주변에 포식자가 없다는(빼기)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원초적 가감을 배우고 차차 더 크고 다양한 세계를 이해해 나간다. 많고, 적고, 높고, 낮은 이 세계의 낱말들은 대칭을 이루고 문장을 만들어 내면서 어느새 우리에게 다양한 암시를 건다. 하지만 그 출발은 나의 세계가 정해놓은 사과의 색에서 출발한다.
그냥 사과는 ‘빨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사과는 빨갛다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 개념은 말 그대로 사물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나 관념으로 집단에서 편집되어 우리에게 차곡이 쌓인다. 언어는 개념과 한몸이다. 또한, 언어는 층을 만들기도 희석하기도 한다. 기택과 박사장의 대비는 총천연색의 세상에서 명료한 대비의 장치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라고 생각하지만 픽셀까지 확대하면 ‘우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장치로. 기택과 박 사장은 ‘우리’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는 우리사회의 존재들에 대한 대비다.
영화는 그렇게 기택과 박 사장을 대비시킨다. 이름만 있던 기택이 기사로, 이름만 있었을 동익은 박 사장으로 개념화를 강요한다. 그렇게 영화는 선악 따위의 대립이 아닌 존재에 대한 대비를 알려준다. 영화이니 이들 당연히 먼 일 나겠다.
장면 둘.
교차의 선들 : 기택은 왜 문광을 쫓아내었나.
영화에서 기택과 박 사장은 대립하지 않는다.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각자의 이기심에 따라 경쟁을 전개하면, 시장기구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국민경제 전체에 질서를 가져오고 부와 번영을 이루게 된다고 썼다. 우리는 이러한 만능의 경제적 자유주의의 체계 아래 살고 있다. 이 세계는 궁극의 쾌락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불가분하게 충돌과 경쟁이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의 개념 또는 약속을 벗어난 반칙이 생길 수 있다. 개개인의 무제한의 이기심이 작동하여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반칙에는 처벌이 필요하다.
신탁의 세계라면 신의 대리인이나 교리에 의해 반칙을 판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 자유주의 세상에는 교리가 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계약만이 존재할 뿐이다. 상황에 따라 목적에 따라 생겨나는 다양한 합의들은 다시 개념화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경쟁에서 승리한 박 사장이 심판이 된다. 그렇게 승리자는 대비의 지리로 위치이동 된다. 그가 우리에게 임명장을 받지는 않았으나 현대의 사회는 그러한 암묵적 합의를 창착하였다. 더군다나 이제는 ‘사과는 빨갛다’라는 개념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듯이 가족이라는 작은 집단에서부터 학습되기 시작하여 점점 큰 집단으로 반복 학습하여 견고해진다. ‘갖은 자는 심판’이 된다.
박 사장은 그래서 근세(문광)에게 존경의 대상이지 경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기택에게도 이러한 등식이 성립된다.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삶을 선으로 그어 위에서 내려 보면 박사장과 근세, 박사장과 기택은 겹치는 지점이 없다. 겹치는 지점이 없으니 일상에서는 충돌이 생길리 없다. 경쟁과 충돌의 대상은 그 선들이 교차하는 기택의 가족과 문광 부부이다.
장면 셋.
동질감 동의 : 기택은 왜 박 사장에게 연교(조여정)의 사랑을 물었나.
최초 인간집단은 도덕을 발명하였다. 집단의 무한한 이기심을 도덕적 감정으로 억제한다. 토마셀로(도덕의 기원)에 의하면 최초 집단에서 협력적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내”가 협동적인 제2의 자아인 “당신”과 함께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2인칭의 도덕(당신과 나)’으로 칭하며, 이것이 한 집단의 학습을 통해 내면화 하고, 문화로 채택되어 타집단에 대한 배타성을 갖게 하기도 한다.(타 종교에 대한 증오나, 세대 간의 갈등, 지역간 갈등을 보라 –영화에서는 각 계층/계급간 갈등이 된다.)
작은집단의 2인칭 도덕이 현대의 대형집단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타인과 항상 협력적 상황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때문에 우리가 속한 집단 내에서는 동일한 수준의 ‘당신과 나’가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그것은 신뢰에 대한 의탁과 위탁이다. 대형화되는 집단에서의 ‘당신과 나’의 관계는 누군가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나와 동일시되어진 당신(또는 집단)의 문화적 바탕에서 일종의 공동저작의 관념으로 견고해진다. 즉, 누군가에게 만들어 채택하게 되면 나와 동등한 ‘당신’의 생산물임으로 ‘나’는 그것이 동등하며 공정하다고 판단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복잡한 집단에서 개인들은 2인칭의 행위자가 되고 파트너에게 선택받을 필요가 있게 되자 남들에게 자신의 협력적 정체성을 알리는 사실이 중요하게 되었다. 그것을 ‘2인칭 말 걸기’라고 하며 사람들은 존중하고 인정하면서 상대에게 말을 건넴으로써 협력적 의사소통의 통로를 열고 동시에 상대에게도 똑같은 존중과 인정을 요구하게 된다.
기택은 박 사장에게 그렇게 ‘그렇지만, 사랑하시죠?’라는 현시대 남편의 모습을 동의하기를 바라며 존중과 인정을 요구하였고, 거절당했다. 많은 선들 중에서 하나라도 닿게 하기 위해 기택이 건넨 말이 고작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챘다. 그것이 선을 넘는 도발임을.
기택은 연민과 범죄자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존재가 되어야 했을까? 그러니까 기택이 왜 박 사장을 죽이게 되었을까? 냄새는 오감 중 맡아지는 선이 아니였던가? 박사장은 ‘선을 넘는다’며 예민하게 굴었을까?
마치며.
불쾌함. 자연스러운 자기방어.
영화의 교묘한 지점은 우리가 기택과 박 사장 양쪽의 입장에서 볼 수 있도록 한 영화의 미장센이다.(속은 것이다. 기우가 그 집을 살 수 없으며 그것이 상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면.) 기택의 가족이 박 사장의 가족이 캠핑을 떠난 날의 신에서 도덕적 긴장을 극대화 시키고 대비하여 우리를 함정에 몰아넣은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기생의 생존방식은 때때로 파괴적이나 대부분 숙주(개미의 창형흡중은 다르다)를 죽이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기택은 기생이 아닌 노동을 하였다. 하지만 근세(기생하고 있는 문광)과 경쟁하며 우리가 기생이라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 졸이고 기택은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들의 도덕적 기준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닐 수 있다. 일상에서의 반칙은 나나 당신도 허용하고 있지 않은가?
집단이 커지게 되면 직접적인 협력적 관계를 통한 신뢰에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직접적인 관계는 도덕이나 문화로 복제되고 확산이 될수록 다양하게 변주된다. 집단이 분화하면서 대비의 층들이 생기고 동등한 자격(도덕)에 대한 느낌이 희석된다. 협력적 관계에서 멀어지면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닌 이질적 문화의 타자가 된다. 선이 그어지면 경계에는 미세한 틈이 생겨나고 충돌과 경쟁에 지친 이들의 무임승차 공간이 된다.
기택의 오판을 우리는 알아챘다. 우리는 그 감각으로 살아남았으니까. 내면화된 도덕이, 완벽할 것 같았던 시장이, 의외로 많은 틈이 있고 수없이 많은 무임승차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외면해 왔는데 돈을 내고 영화로 보는 것이 힘들었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가해지는 불평등한 압력을 모르는 척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적나라하게 날것 그대로 균열지점을 찌른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집단에 각각의 역할로 속해 있다. 집에서는 가족 구성원으로, 친구들의 관계에서, 직장과 관계사로, 지역에서 각각의 역할이 있다. 직접적인 접촉과 확인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반칙을 저지른다. 팔꿈치 사회(달리기에서 옆 사람을 팔꿈치로 교묘하게 치며 나아가는)에서 가속화된 충돌과 경쟁이 그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영화로 만들어진 것뿐이다.
그래서 영화 내내 너무 불편하고 불쾌했다 사실 중간부터 귀를 막고 보다 비가 내리는 신부터는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기를 몇 번 반복했다. 불쾌함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 기제로 죽은 동물의 사체 따위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순간순간 나를 마주하게 되는 장면들을 못견뎌한 것 같아 짜증이 나고 불쾌한 것이다.
……
기타.
연교가 어수룩하다는 평가는 소개를 받는 과정에서 속임보다 신뢰를 보이는 것에 대한 우리의 자기방어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수없이 받는 스팸 전화에 욕을 하며 바로 끊지 않고 둘러대거나, 업무 상대를 만날 때 서로가 거짓 신뢰를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
호손 효과라는 것이 있다. 이 실험은 1920년대 실행된 프레데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에 따라 이루어진 실험으로 무려 8년간 이루어졌다. 계전기 조립에 종사하는 여공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다양한 환경변수로 생산성 변화를 관찰하는 실험인데 결과적으로 실패한 실험으로 사례화 되었다. 그중 하나, 계전기 조립공정에서 조명을 밝기 변화에 따른 실험을 통해 생산성의 차이를 측정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안 피 실험자의 생산성에는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실험이 종료되고 생산량이 더 늘었다 한다. 이는 피 실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행동의 변화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극장에 들어선 순간 감독에게는 편한 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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